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델리 술탄국 (문단 편집) == 정치 == 12세기 말경 북인도 지역에서 [[튀르크|튀르크인]]들에 의해 세워진 왕조는 점차 강력한 힘을 가진 중앙집권적 국가 형태로 변모했다. 그후 15세기경까지 [[노예 왕조]], [[할지 왕조]], [[투글루크 왕조]]로 이어져 내려온 델리 술탄 왕조는 점차 붕괴되면서 몇 개의 독립국가 형태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술탄]]의 행정 조직은 여전히 강한 힘을 발휘했으며 [[무굴 제국]] 시대까지 영향을 미쳤다. 비록 인도 내에 있는 튀르크계 술탄들 대부분은 자신들이 [[바그다드]]에 있는 [[아바스 왕조]] 칼리파의 충성스러운 대리인이라고 선언하긴 했지만, 당시 [[아바스 왕조]]는 그 권위가 많이 약해진 상태였다. 이는 [[칼리파]] 그 자체가 형식적으로 [[이슬람]] 세계의 일부라는 사실을 확인할 뿐이었고 실질적으로는 자신들이 정치, 사법, 군사의 모든 권한을 누리며 다스리는 지역들의 안전을 책임졌다. 델리 술탄 왕조의 [[왕위 계승의 법칙]]은 보통 그 후손이 물려받는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장자가 그 지위를 이어가진다는 법칙은 없었다. 따라서 모든 아들들이 똑같이 술탄의 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었고, 실제로 몇몇은 장자가 아닌 다른 자가 술탄의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심지어 [[노예 왕조]]의 일투트미쉬의 경우, 후계자로 아들이 아닌 딸이었던 [[라지아 술타나]]를 지목하기도 했다. 이에 대한 내용은 [[노예 왕조]]문서를 참조. 거기다 술탄이 혼자서 그 후계자를 지목할 수도 없었고 귀족들의 동의가 필요했다. 그래서 술탄들은 지위를 성공적으로 계승시키기 위해서 [[군대]]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물론 그걸 유지시키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반란과 내전, 쿠데타, 그리고 술탄들의 암살은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술탄들은 보통 자신이 임명한 [[재상]]들과 함께 정사를 펼쳐나갔다. 그러나 재상들의 수는 일정하지 않았고 행정체계는 13세기 말경이 돼서야 확립되어진다. 행정 조직에 있어서 핵심은 '[[와지르]]'였다. 초기에 와지르는 장군을 뜻했는데 14세기에 이르면서 재정업무의 전문가로 성격이 변질되어 세입을 담당하는 분야에서 주로 일했다. 무함마드 투글루크는 재정분야의 조직에 관심을 기울여 원정을 나갈 때에도 당시 널리 신망받는 와자르인 크와자 자한을 반드시 수도에 남겨두었다. 와지르 다음으로 중요한 부서는 국방을 담당하는 [[다완]]이 아르즈였으며 이 부서의 장을 '아리즈 이 마마릴크'라고 불렀다. 하지만 군대의 [[총사령관]]은 아리즈가 아니라 술탄 자신이 직접 맡았다. 그렇지 않으면 군대의 지휘관이 자신을 배반하고 [[쿠데타]]를 일으킬 위험성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인도에서 이 국방부서를 처음으로 독립시킨 것은 할지 왕조 때였다. 이 밖에도 종교적인 문제를 다루는 '다완 이 리살라트'가 있었고 그들의 수장은 사법부의 수장도 같이 맡았다. 그들은 이슬람의 율법인 《[[샤리아|샤리라]]》에 근거한 법을 만들어 모든 [[무슬림]]들이 실행하도록 했다. 그에 반해 [[힌두교]]에 대해선 촌락과 도시의 경우를 따로 나누고 각 계급의 우두머리들에 의해 제정된 자신들의 법에 따르도록 자치를 허용했다. [[튀르크인]]들은 정복한 지역을 튀르크계 [[귀족]]이 이끄는 '이크타스'라는 몇 개의 집단으로 나누었다. 후에 [[현(행정구역)|현]]으로 번역되는 이크타스는 사실상의 [[영주(중세)|영주]]가 통치하는 [[봉건제]] [[영지(역사)|영지]]로써《무크티스》라는 독립적인 법을 제정하고 토지세를 받아 그것으로 관리들의 봉급을 지급하는 등 모든 업무들을 독자적으로 시행했다. 그들의 결집력은 중앙 정부의 힘에 반비례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